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레우코스 제국 (문단 편집) == 세금 제도 == 현대 정치학 이론상 셀레우코스 제국은 바실레프스(왕)를 제외한 신민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형태의, 절대신의 대리자 통치 하의 전제군주정 국가다. 따라서 최정점의 바실레프스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모든 토지는 이론상 왕의 토지였고, 이는 곧 신민이 직접 세금을 내야 함을 뜻했다. 당연한 말인데, 이는 왕의 대리자인 지방지사([[사트라프]])가 토지의 크기에 따라 신민에게서 세금을 징수해 수도로 보냄을 의미했다. 즉,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의 명령이 미치는 모든 땅은 왕실 토지로 간주됐고, 이에 의거해 국가는 신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세했다.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 그 후계자들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지만, 그 땅을 관리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고 오해 받는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의 바실레프스들은 새로운 방법의 징세, 행정 기술을 만들어내지 못했더라도, 결단코 무능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세금 제도와 재정 운용 방식을 계승해, 이를 영리하게 활용했다. 화폐 발행과 활용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중요한 세금 제도이자, 정치 선전 수단으로 활용됐다. 셀레우코스 군주들은 새로운 땅에 자신들이 개발한 세금 제도, 행정 제도, 법 제도 대신 페르시아의 것을 활용했고, 그들이 선호한 방식은 [[다리우스 1세]]의 세금 개혁에 기반한 은본위 세금 징세였다. 따라서 셀레우코스 제국 아래에서 지중해 세계는 화폐 경제가 발전하고, 이를 기반으로 현물 대신 화폐 징세가 보편화됐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어느 정도의 변화도 일으켰다. 통치의 기반인 군사력과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현금(특히 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이전에는 현물로 걷던 조세를 현금으로 납부하도록 규정하고 신민들에게 화폐 단위로 직접세를 징수했다.[* 화폐 경제와 조세 금납화로의 전환은 군주들이 도시화 정책을 실시해서 화폐 경제가 발달한 도시들이 많이 생긴 덕분에 가능했다.] 여러 가지 부가세를 제정하고 통제 경제 체제를 구축해서 국가 경제를 강하게 통제했다. 제국 정부의 주요 세입은 은광을 비롯한 광산들이 많았던 소아시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동방에 위치한 그리스 도시들, 토지가 비옥하고 수확량이 풍족한 메소포타미아에서 징수하는 세금이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샤트라피와 관료에게 지급하는 급료, 자문회 유지 비용, 신전과 도시에게 주는 기부금, 도시 건설과 이주민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정을 지출했으나 전체 지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군비였다. 제국은 평소에도 전체 재정의 50% 이상을 군비로 지출하고 전시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소모했다. 추측컨대, 디아도코이들 사이에서 전쟁이 잦았던 만큼, 군비로 인한 재정 지출이 엄청났을 것으로 보인다. 각 지방에 파견된 샤트라프는 군주에게 공물과 세금 징수 현황을 보고하고 징수한 현물과 화폐를 저장했으며 샤트라프 휘하의 재무 관료들은 속주의 재정과 각 지방에 산재한 왕령지 관리를 담당했다. 그리고 제국은 관료와 군인들에게 화폐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지급했다. 이러한 샤트라피 재정 제도와 급료 · 수조권 지급 제도는 비록 완전한 수준은 아니지만, 제국이 페르시아의 제도를 어느 정도 계승한 것이었다. 정부와는 별도로 재정을 꾸려나갔던 왕실은 왕령지의 농장과 삼림, 광산에서 보내오는 연공과 물자로 수입을 올렸다. 그리고 왕실은 배상금 청구와 전리품 확보, 왕령지 매매, 특별세 징수, 도시에 특허장을 부여하고 돈을 받는 등의 방식을 통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왕실의 수입은 연공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러한 방식으로 얻는 돈은 임시 수입에 지나지 않았다.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세금은 토지세였다. 제국 정부는 모든 토지의 농업 · 목축 생산력을 평가해 할당량을 정하고 왕령지와 신전, 도시와 마을, 지역 공동체와 민족 공동체 단위로 세금을 부과했다. 제국은 영토가 넓어서 각 지역별로 수확량과 생산품의 가치가 달랐기 때문에 관료들은 이러한 차이를 고려해서 세금을 할당하고 징수는 지방 관료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 편중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거나, 면세혜택을 일방적으로 내린 흔적은 없다. 토지 외에도 세금을 거뒀다. 제국은 가축 보유량에 맞춰서 유목민과 가축을 가진 인민들에게 목축세를 징수하고 왕령지에 소속된 목초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용료를 걷었다. 일정 연령이 된 남성에게는 인두세를 부과하고 기술자 계급에 대해서는 공방의 기술자 숫자에 맞춰 인두세를 걷었다. 그리고 포로와 노예 노동을 쓰긴 했지만, 자유민들에게 부역을 부과해서 운하와 수로를 수리하고 도로망을 보수하는 등의 공공 사업도 진행했다. 제국 정부는 상공업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세금을 징수했다. 각 지방과 하천을 통과하는 상품, 항구에 입항한 선박, 도시에 들어오는 상품에 통과세와 관세를 징수하고 소금과 목재, 금속, 사치품 등의 재화에 간접세를 매겼다. 그리고 도시에서 상품을 매매할 때는 상품세, 각종 상거래와 노예 등록, 부동산 거래를 할 때는 상업세를 징수했다.[* 노예를 매매할 때는 상업세와는 별개로 노예세를 매겼다.] 그밖에도 신자들과 부유층들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는 신전들에는 신전세, 군주가 도시를 방문하면 그 도시의 인민과 지배층, 통치자에게서 접대세를 징수해서 체재 비용을 충당했다. 관료 숫자가 부족하고 관료제가 미성숙해서 확실하게 전체 지역을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제국의 인구는 1천만 ~ 3천만 명에 육박했기 때문에 적당히 걷어도 상당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대한 제국의 수많은 지방에서, 각기 다른 제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세금은 극도로 종류가 다양하고 복잡했다. 그래서 세금 제도의 운영과 관리는 정부에게 비정상적으로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군주들은 관리를 포기하고 적당히 징수하거나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이유로 정기적인 감세와 면세 조치를 취해서 스스로 부담을 '줄였다.'[* 정치적인 지지가 필요하거나 지역민들의 호의를 사기 위한 목적으로도 감세 · 면세조치를 해주었다. 또한,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 대해서도 감세와 면세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군주들이 조세 금납화를 밀어붙이긴 했지마는 도시의 영향권 밖에 위치한 향촌 지역들은 물물교환과 현물세 납부가 일반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